꼴찌 고2학생 인생동기부여 중국운남성 여행기

제가 중국어스터디를 할 때 직장인학생이 한분 있었는데요. 어느날 그분의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고등학생 아들이 있는데, 담배피고 집에서 게임만 하고 성적은 반에서 꼴찌입니다. 저렇게 살면 안 될 것 같은데… 공부를 조금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방법이 있을까요?”

고2 인데 성적은 꼴찌인데다가, 담배, 술도 하면서 어머님께서 말씀하신 더 큰 문제, 방안에서 게임만 하더군요. 공부하라고 잔소리도 많이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말씀을 드렸죠.

“부모님들도 이전에 아버지, 어머니가 공부하라고 잔소리 했을때, 공부를 열심히 안 하셨을텐데, 자기 자식한테 공부하라고 한다고 말 듣겠습니까?”

사실 잔소리해서 자식 좋은 대학보내기 올림픽이 있다면, 저의 어머니는 금메달감이죠.

“제가 공부하게 한 번 동기부여 시킬 자신 있는데, 해 보시겠어요?”  라고 시작한 위의 사진속 저 학생과의 중국운남성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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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러 좀 더 고생스러운 배낭여행을 했습니다. 저는 출발전부터 이미 계획이 있었거든요. 저 학생에게 인생의 새로운 동기부여를 시킬 방법에 대해서 말이죠.

중국운남성의 쿤밍에 도착해서 1박후 다음날 운남성 따리大理로 이동을 했습니다. 

아직 첫날이라 표정도 깨끗하고 상태도 양호하네요. 보니까 담배도 피고, 과체중이라 기초체력이 좀 안 좋아 보였습니다. 

난생처음 해보는 해외여행에 첫날 기분은 좋아 보이더군요.

저는 인솔하는 입장이라 여행내내 긴장, 걱정, 계획수립, 일정짜기 등등으로 많이 힘들었습니다. 

저 학생은 기초체력이 안 되더군요. 일단 아침일찍 일어나는 것 자체를 힘들어 하더라구요. 스스로 일어나 본적이 없었으니까요.

그리고 이 학생이 보다 더 많은 것들을 보고 느끼고,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세상이 넓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려 했습니다. 

인생을 컴퓨터모니터 앞에서만 배울 수가 없고, 가상세계 게임속에서만 배울 수 없다는 걸 느끼게 해 주고 싶었습니다. 

大理白族自治州 따리 바이소수민족 자치구의 따리고성 입니다. 마을전체가 아름다워 많은 여행객들이 찾는 곳입니다. 

저는 여기 2000년도 여름 처음 왔을때, 쿤밍에서 심야침대버스를 타고 이동했습니다. 시간과 숙박비를 아끼려구요. 그 당시 침대버스를 처음 타 보았는데, 내 머리가 뒷사람의 발쪽으로 향해서 눕는 형태인데, 냄새가 너무나 심하더군요. 

책방 앞에서 책을 읽으며 물건을 팔고 있는 어느 소녀의 모습입니다. 

다양한 물건들도 팔고 있습니다. 이 지역 특산품이 저 염색한 천… 저도 2000년도에 저 염색한 옷을 하나 사서 입고 다른 옷과 함께 세탁했다가 물이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중고옷도 파는 모습이네요.

길거리 당구대 입니다. 제가 중국에서 저런 당구대에서 당구를 몇 번 쳐봤는데, 공이 가면서 휩니다. 표면도 고르지 않고, 전체적으로 울퉁불퉁, 휘어있습니다.

어느 식당에서 고기를 다지는 모습입니다. 

고성내의 시장입니다. 

건물사이 좁은 통로에 시장이 형성되어 있는 것이 인상적이구요.

마을전체를 따라 흐르는 물을 채소에 붓는 모습도 인상적입니다. 물이 깨끗한가 보네요.

우리에게도 친숙한 물엿으로 만든 과자입니다.

해바라기씨를 팔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 학생에게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해 주고 다양한 세상을 경험하게 해 주고 싶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이 세상은 살아가기가 쉽지 않다는 것도 간접적으로 느끼게 해 주고 싶었고, 너는 아직 부모님이 계셔서 매일 방에서 담배피며 컴퓨터게임만 하며 살 수 있지만 어느 순간 너는 독립을 해야한다는 것도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또, 어머니가 너를 위해서 엄청 고생하시며 장사를 하고 계신다는 것도 알려 주었습니다. 

그렇게 따리를 뒤로 하고 다음 행선지인 리장麗江으로 향합니다. 버스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다음편에는 정말 아름다운 리장고성편을 올려 보겠습니다.

제가 이번에 이 학생과의 운남성여행기를 다시 올리는 이유는,

아름다운 사진들이 이글루스폐쇄되면서 기존여행기가 다 사라져 아쉬움도 있었고.

얼마전 EBS 교육관련 다큐를 보는데

불필요한 사교육비에 대해 나오더군요.

용기없는 부모들 많죠. 

인생을 어느 정도 살아보니 20대 30대때 깨닫지 못 한 것들이 점점 보이던데 말이죠.

오토바이여행을 조금씩 꿈꾸고 있습니다

아침 운동을 하려고 스쿠터를 타고 가는데, 오토바이 한대가 쓰러져서 방치되어 있더군요. 거의 매일 오가는 도로이니까, 늦은밤 혹은 새벽에 저렇게 방치를 한 것으로 추측이 됩니다. 전날 에는 못 봤거든요.

도로에 스키드마크도 없고, 오토바이가 크게 파손된 모습도 안 보이며 헬멧도 2개가 오토바이 근처에 얌전히 있는 걸로 봐서는 사고는 아닌 것 같고, 모종의 오토바이 고장이 아니었나 생각이 되더군요.

저도 최근에 스쿠터를 타기 시작하면서 시내쪽 근거리를 나갈때는 스쿠터를 타는데요. 제 스쿠터는 Gogoro 가장 낮은 등급이라 최대속도가 54Km/h 입니다. 

신호대기중 더우니까 저도 보통은 그늘에 오토바이를 세우는 편입니다.

오토바이 체인이 빠져서 방치를 해 둔건지, 체인은 그 뒤에 빠진건지 모르겠지만, 헬멧의 사이즈를 봤을때, 운전자는 남자, 동승자는 여자였던걸로 보입니다.(물론 머리가 작은 남자도 있을 수 있습니다만…)

운전을 하고 가다가 도중에 싸우다가 홧김에 오토바이 방치하고 간 건 아닌지 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늘이 없을 경우, 이렇게 버스옆 그늘에서 태양을 피하기도 합니다.  

저도 스쿠터 탄지 대략 반년정도 되었는데, 자동차로만 이동을 하다가 스쿠터타니까 나름 재밌더군요. 스쿠터를 타면서, 원동기면허를 한번 따 볼까 라는 생각도 합니다. 

여행유튜버 빠니보틀이 노홍철과 곽튜브와 함께 오토바이로 베트남 산악지대로 여행하는 영상을 보면서도 그랬고, 저의 외국지인이 베트남에서 오토바이로 여행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그동안 저는 자동차로만 여행을 다녔는데, 오토바이로 여행을 해도 재미있겠다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대만도 그렇고 태국도 오토바이로 여행을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찍은 사진들입니다. 만약 저 사람들이 방콕에서 출발했다고 하면 첫번째 장소는 적어도 6시간~8시간 정도는 걸릴 장소인데요. 태국의 산길들 중에 꾸불꾸불한 도로가 많아서 라이딩 하는 사람들 사이에 유명한 도로도 있습니다.  

제가 스쿠터 타기전에는 자동차여행이 더 좋지 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막상 스쿠터를 좀 타다보니 좀 멀리 여행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긴 합니다.  빠니보틀-노홍철-곽튜브 베트남 오토바이 여행하는 걸 보니 좀 친한 친구들이랑 함께 여행하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저는 외국에 나와 살고 있어서 한국의 친구나 지인과 여행을 해 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4명 정도 여행을 하는 것이

음식주문할 때 다양하게 시켜서 이것저것 맛 볼 수 도 있고, 차량 한대에 4명이 탑승하면 기름값도 딱 경제적이고, 장거리여행하면서도 좀 덜 심심하고…

제가 며칠전 미국친구와 여행한 사진을 올린 적이 있는데요. 둘이서만 갈때와 3명, 4명 갈때가 확실히 대화의 양이 달라집니다. 

언젠가는 오토바이로 장거리여행 할 수 있을 날이 오겠죠. 그 전에 친구들 4명과 장거리여행을 좀 하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은 늘 해 봅니다. 

태국의 불상나무, 한국의 타이어나무

태국이나 대만 여행하면서 나무가 불상의 머리나 불상, 혹은 건물을 감싸는 그런 풍경을 종종 보는데요. 그걸 볼 때마다 이런건 돈으로 사지 못 하는 세월이 흘러야만 만들어질 수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지난달 한국출장갔을때, 타이어 사이로 나무가 자라 있더군요. 이걸 보면서 이것도 나름 세월이 만든 작품? 이라고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태국 아유타야에서 유명한 나무속 불상머리이죠. 보통은 저런 식으로 나무가 자라면서 불상을 감싸는 형태인데요. 

굳이… 아주 굳이 저 타이어나무가 더 어려울까 불상나무가 더 어려울까 라고 생각을 해 본다면, 당연히 불상나무죠.

타이어나무는 뿌리쪽을 뽑아 타이어 집어 넣고 다시 심으면 저런 모양 비슷하게는 만들 수 있으니까요.

이런식으로 나무전체가 담벼락이나 건물을 감싸 안고 있는 형태도, 나무 뽑아서 어찌어찌 한다고 되는 부분이 아니죠. “좋은 세월”이 흘러야만 만들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조직이나 스포츠팀에서도 경력이 많은 고참과 젊은 사람들의 조화가 필요합니다.  젊은 사람들의 능력도 중요하지만, 어떤 부분은 세월이 흘러 쌓여야만 배우고 느낄 수 있는 것들이 있거든요.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시는 40대 이상의 분들은 아마도 느끼실 겁니다. 본인들의 20대 30대때 생각과 행동들이 얼마나 부족함과 아쉬움이 많았는지. 그리고 그 나이때에는 경험이 없어 그럴 수 밖에 없었음을 아실 겁니다. 

여기 태국의 옛수도 아유타야의 유적지에서는 미얀마왕조와의 전쟁의 상흔을 볼 수 있습니다. 많은 불상들의 머리가 잘려져 나가 있는걸 볼 수 있습니다. 

전쟁을 하는 군대에서도 마찬가지죠. 좋은 경력을 가진 고참이나 지휘관이 필요하죠. 아무리 신체능력이 뛰어난 신참만으로는 전쟁에서 이기기가 힘듭니다. 

제가 군복무시절, 90년대 초반, 연세대후문쪽과 명동롯데백화점 앞쪽에서 시위를 막은 적이 있는데요. 당시 부산에서 거의 주말마다 시위진압을 위해 나갔었지만 당시 서울 연세대 시위규모가 너무 커서 부산을 비롯 전국각지에서 지원을 나갔었습니다. 

낯선? 서울, 그것도 시위가 극렬하다고 하는 연세대쪽에 방패들고 서 있으니 좀 무서웠습니다. 당시 가장 막내군번 이었거든요. 방패너머로 대학생들이 쇠파이프 들고 있으니 엄청 긴장이 되었는데, 처음으로 고참의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확실히 고참은 고참이더군요. 뒤에서 계속 겁먹지 말고 쫄지 말고 정신 똑바로 차리고 방패 잘 들고, 대학생들이 공격해 들어오더라도 뒤에 고참들이 있으니 방패조는 대열무너지지 말고 라면서 계속 분위기를 잡았습니다. 

또한, 대학생들을 향해서도 도발?까지 하면서 들어올테면 들어오라고 소리를 치니까 당시 연세대후문과 명동롯데백화점 앞도로에서 고참들의 필요성이 느껴지더군요.  물론 그 외에는 맨날 고참들에게 구타당하던 시절이라 싫었지만 딱, 그 두번은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네요.

시위진압을 거의 주말마다 나갔고, 한번은 울산현대노동자 파업으로 15일인가? 인근 학교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시위진압을 나갔던 것 같은데, 그런것도 이제 세월이 지나니까 그런 시위진압을 나갔었는지 기억도 가물가물 하네요. 정작 시위진압의 힘듬 보다는, 아침/저녁 고참들에게 구타당하던 고통이 더 커서 그런가 봅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큰일날뻔한 군대이야기는.

  1. 연세대 후문 방어할 때 개인에게 수류탄형 최루탄 2개씩을 지급해 줬는데, 저는 그걸 어떻게 몸에 지니는지 몰라 옷에 대충 걸쳐 두었다가 이동중 떨어뜨렸는데, 주위에 있던 다른 중대원이 주워준일… 아마 그거 분실했으면 그날 밤은 물론이고 며칠동안 갈비뼈 몇 개 나갈 정도로 구타를 당하고 어쩌면 영창 갔었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구타하면서 심한 부상을 당하는 부대원들이 많았습니다)
  2. 토요일 오후 부산남포동쪽 시위진압을 나갔었는데, 그날 자기가 챙기는 고참의 판쵸우의 꼭 챙기라고 했었나 보더군요. 그런데 저는 그 지시를 분명히 못 들었거든요. 그 당시는 거의 막내라 병장의 판쵸우의를 안 챙긴다는건 뭐 있을 수도 없는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출동을 나갔는데, 아니나다를까 토요일 오후가 되니 예보대로 빗방울이 떨어지더군요. 그래서 진압복위에 판쵸우의 착용명령이 떨어졌는데, 제가 챙기는 고참만 판쵸우의가 없었습니다. 제가 안 챙긴거죠.

그 순간… 오늘밤 점호시간에 죽도록 맞겠구나 라고 생각을 했는데, 다행히 비가 많이 내리지 않았었고 또 제가 챙기는 그 고참이 약간 좀 멋을 부리는 스타일이었습니다. 의경부대에는 기율경 이라고 무전기 몇 개 몸에 차고 있으면서 중대장의 지시를 무전으로 지시하는 약간은 특수위치라서 다른 대원과는 달리 청바지에 사복을 입고 머리도 좀 기를 수 있는 그런 위치였습니다. 그래서 칙칙하고 냄새나는 판쵸우의 입는걸 싫어했거든요. 그 날 그 고참이 ‘나는 판쵸우의 냄새나서 싫다. 안 입어도 된다” 라고 해서 소위 상병급들이 그냥 넘어간 사건도 있었습니다. 

그날 만약 그 병장이 상병에게 한마디 했으면 부대복귀해서 적어도 갈비뼈 한두개 정도 날아갈 정도로 군화발로 차였을텐데 말이죠.

갑자기 군대이야기 나와서 이야기가 살짝 샜습니다. 

태국방콕의 두리안도매시장 풍경

이전에 태국동남부, 라용의 대규모 두리안도매시장 소개를 해 드린 적이 있는데요. 오늘은 방콕의 두리안도매시장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당연히 두리안도 계절과일이니까 두리안’만’ 파는 곳은 아닙니다. 

최근 저의 대만아내가 두리안이 먹고 싶다고 하더군요. 집근처 과일가게에도 두리안을 팔긴 합니다 그런데 보통 몇 개 안 되는 두리안 올려 놓고 좀 비싸게 팝니다. (태국에서 수입하니까 그럴 수 있죠)

제가 태국살면서 두리안 좀 먹었거든요. 두리안이 저렇게 쌓여 있어도 맛있는 것이 있고, 맛 없는 것이 있습니다. 제주산 귤이라고 다 달고 맛있지 않듯이 두리안도 잘 못 고르면 맛이 없습니다.

여기는 방콕의 어느 심야과일도매시장인데요.  마침 두리안 제철이라 두리안이 많았습니다. 

저는 태국 살면서 두리안 농장도 몇 번 가 보고, 6종류의 두리안도 다 맛 보았죠. 물가가 싼 태국이지만 두리안은 여전히 비싼 과일에 속해서 태국에서도 두리안을 미친듯이 마음대로 먹기에는 부담이 있습니다.  

주변 소매점에 두리안을 배달하는 모습입니다. 여기는 소매점이라고 해도 저기 보이는 것처럼 두리안의 양이 엄청 나더군요.

저도 대학생시절, 과일도매상에서 부산시내 소매점에 트럭으로 과일배달 하는 알바를 한 적이 있었죠. 그 당시 꽤 오래 그 일을 했었습니다. 1톤 혹은 1.4톤 트럭으로 부산시내에 오렌지, 파인애플, 수박, 포도, 사과 등등을 배달하는 일을 했었습니다. 어떤 곳은 낮시간대에, 어떤 재래시장은 위의 사진처럼 새벽에 배달을 해야해서 새벽같이 일어나 시장통의 과일과게에 배달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새벽시장은 사람들이 새벽에도 많아서 차가 들어가기 힘들때가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1톤트럭으로 부산의 부전시장 같은 곳에 사람사이를 뚫고 들어가서 배달했습니다. 

제 유튜브채널에 태국의 심야시장 소개를 해 드린 적이 있는데요. 이전의 부산 부전시장에도 새벽에 사람이 엄청 많았습니다. 

포도는 가벼워서 쉬웠고, 사과상자는 무거워서 힘들었는데, 그럼에도 한번에 4~5개씩 등에 올려서 들고 배달을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까대기’ 라고 했는데 뭐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포도는 알이 떨어지기 쉬워 좀 조심해야했고, 수박은 혼자서 배달이 어려워서 2인1조로 다녔습니다. 수박도 그렇고 포도도 운송중 파손이 되는 것이 있어서 보통은 도매상측에서 1~2개 정도 더 넣어 줍니다. 그러면 저같은 배달기사들은 파손 안 시킨다는 확신이 있어서 포도 한 송이 정도는 배달가면서 차에서 먹곤 했었죠. 특히 거봉….

부산 동래지하철역 부근에 ‘메가마트’인가 대형마트가 있었는데, 어느날 이른 아침 거기 대형트럭으로 포도박스를 가득 쌓아 배달을 갔었습니다. 

하얀색 스티로폼 포도박스 였는데, 그 당시 포도박스는 그 도매시장 소속 아저씨들이 쌓았습니다. 메가마트 화물차 주차장에 도착해서 검은색 고무줄을 푸는 순간 7개로 쌓아 올린 포도박스가 쓰러져서 주차장 바닥에 포도들이 ‘영.화.처.럼.’ 쏟아졌죠. 순간 망연자실 서 있었습니다. 그 많은 포도알갱이들이 주차장에 확 뿌려졌으니까요.  바로 사무실 실장님에게 전화를 했는데, 뭐 쿨하게 청소 잘하고 회수해 오라고 하더군요. 저는 제가 배상해야하는지 좀 걱정을 했었거든요. (당시에도 포도는 비쌌습니다) 

한번은 사과박스를 제가 쌓았는데, 제대로 안 쌓아서인지 부산의 동서고가도로 커브길을 도는데, 박스전체가 옆으로 기울면서 차가 옆으로 기울어지더군요. 순간적으로 옆차선을 보면서 최대한 트럭이 전복 안 되고 상자가 쓰러지지 않게 균형을 잡았던 아슬했던 적도 있고…

트럭지붕에 나무로 된 박스모서리에 대는 나무막대가 있는데 그걸 올려 놓고 달리다가 바람에 날려 뒷차에 맞을 뻔한 적도 있고…

학창시절 했던 알바 치고는 월급도 많고 재미있었던 과일배달 알바 였습니다. 그때는 힘도 좋고 체력도 좋아 저런 알바도 했었죠. 또, 운전기술이 조금 있어야 하거든요.

여기는 소매점에도 두리안의 수량이 많아서 좀 비싼것부터 싼것까지 다양하게 맛 볼 수 있구요.

그리고 두리안 맛좀 본다는 사람들이 많이 오다보니 전체적인 품질도 좋습니다. 태국에서도 가끔 어설픈 곳에서 구입하면 맛 없는 두리안도 있거든요.

딸을 안고 두리안을 팔고 있는 가게주인입니다. 

저도 두리안을 좋아하고 두리안이 먹고 싶긴 하지만, 저의 집 주변 과일가게에는 두리안 몇 개 올려 놓고 파는 정도라 맛이 있을지도 의문스러워서 대만에서는 구입을 하지 않게 되더군요.

두리안 생각이 나서 태국 살 때 가 보았던 방콕과일도매시장, 두리안 소개를 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과일도매시장 보니까, 대학생시절 도매시장에서 배달 했던 기억도 나구요.

참고로.. 그 당시 그런 도매시장에는 상권보호를 위해 조폭이 있었거든요. 그 당시 저의 사무실에도 조폭분이 한명 있었죠. 평소에는 성격도 좋고 얼굴도 좀 순하게 생겼으며, 배달 없을땐 저와 바둑도 종종 두곤 했는데…

온몸에 문신이 있어서 여름에도 땀 뻘뻘 흘리며 긴팔 입고, 당시에 거의 아파트 한채가격 한다는 갤로퍼 SUV를 몰고 다니면서 남포동 같은 곳에 함께 나가면 어디서 나타났는지 검은색 옷 입은 어깨들이 ‘형님’ 하면서 90도 인사를 했었던 그런 기억도 있습니다.  

미국친구 데리고 대만루캉시 단오절 드래곤보트 축제 다녀왔습니다

미국인친구를 데리고 저의 카페 인근 도시인 루캉이라는 지역의 드래곤보트축제에 다녀 왔습니다. 지난 단오절연휴에 다녀 왔었는데요.

저는 이전 타이베이 살 때 집 앞 강에서도 드래곤보트 연습하는 사람들이나 시합을 종종 본 적이 있고, 까오슝에서도 단오절에 본 적이 있습니다. 이번에 저의 카페 단골손님인 미국인친구가 1년간의 대만생활을 마치고 귀국을 하기 전, 단오절기분을 낼 수 있는 곳을 찾아 가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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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지방도시의 드래곤보트 축제인데, 한무리의 미국인들이 모여 있더군요. 이야기를 좀 나눠 보니, 18세 이하로 이루어진 자녀들의 학교 드래곤보트팀에서 이 시합을 위해 미국에서 왔다고 했습니다. 

자녀들의 이런 스포츠활동을 위해 미국에서 온 것도 대단하고, 그 자녀들을 응원하기 위해 학부모들이 함께 와서 응원하는 모습도 부러웠습니다. 대다수의 가정은 이런 여유가 없잖아요. 

역시 교육은 어느 정도 ‘경제력’이 받쳐줘야 한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다시 한 번 느꼈습니다. 

더 많은 영상과 내용은 유튜브로 올려 두었습니다. 길지 않은 영상이니 한번 보시면 재미 있으실 겁니다. 

보트에는 최소 8명 이상의 여자선수가 탑승을 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더군요. 그래서 남녀 함께 즐길 수 있어 더 좋아 보였습니다. 

중화권에서는 이런 드래곤보트, 용주龍舟 가 보편적이고 많은 사람들이 즐깁니다. 제가 아주 이전 홍콩출장 자주 다닐때, 홍콩이나 심천에서 살게 되면 중화권사람들, 외국인들과 이 드래곤보트 연습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거든요. 결국 지금까지 실현하지 못 하고 있는 꿈이네요.

여기 루캉시는 제가 살고 있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인데, 그동안 기회가 없었다가 이번 단오절연휴때 가 볼 수 있었습니다. 

작은 지방도시인데, old street 도 있어 옛스런 느낌도 나면서 위의 사진처럼 잘 정돈된 구역도 있었습니다. 

도시전체에 이런저런 단오절축제를 하고 있어서 사진처럼 도로에도 사람들이 넘쳐나는 모습입니다.

이런저런 노점들도 있어서 다양한 음식과 물건들을 판매하고 있었습니다. 

여기 Old street 느낌 괜찮더군요. 오래전에 형성된 거리와 건물들의 느낌이 좋았습니다. 규모면에서는 타이난의 그곳보다 더 크더군요.

태국에서도 그랬지만, 이런 오래된 건물들을 하나하나 구경하며 걷는 걸 좋아합니다. 

저날, 저 등지고 있는 미국인친구를 위해 여기 왔었는데요. 

저 미국인친구도 미국뉴욕쪽에서 공학박사과정을 밟고 있으면서 정부지원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일년간 영어를 가르치며 대만생활을 하고 며칠전 돌아 갔습니다. 항공권 체류비 일체를 지원 받고, 월급도 받으면서 해외생활 하고 언어도 배우고…

거기에, 저 미국에서 온 학부모들. 자식들 드래곤보트 학교활동을 위해 대만까지 와서 지원해 주고 또, 함께 따라와 저렇게 응원도 하고.

역시 어느 정도 경제력이 있어야 양질의 교육도 받을 수 있다는 걸 다시 한번 느낀 하루였습니다. 

저는 중국에서 공부를 좀 하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한학기 4개월 어학당코스만 수업을 마치고 직장생활을 했습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4개월수업 + 방학 2개월 이런 식으로 중국어를 배워 직장생활을 시작했으니 어림 없었죠. 당시에는 돈이 없었습니다. 그나마 중국에서도 돈이 없어 거의 매일 1원 2원 짜리 만두 같은거만 먹는 날도 많았고, 산동성 겨울인데 난방없고 온수 없는 싸구려 원룸 빌려서 생활했었거든요. 지금도 그게 너무나 아쉽긴 합니다. 

그 때 돈이 쪼끔만 더 있어서 쪼끔만 더 제대로 공부를 하고 사회에 나왔으면 직장생활, 사회생활, 인생이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을테데 라는 생각이 아주 쪼끔은 듭니다. (한탄아님. 불평불만아님)

가끔 중국에서 4년제 대학을 나왔는데, 중국어를 저것밖에 못 하냐 하는 사람들이 보이거든요. 부모돈으로 유학가도 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건 아니니까요… 그냥 그렇다는 겁니다. 

저 미국친구 귀국하는 날 오전에 저의 카페에 와서 체스도 몇 판 두고 저렇게 배웅해주는 친구들과 인사도 했습니다. 이란-미국-한국-대만 사람 입니다.

그 전날밤에는…

저의 카페 마감하고 12시까지 하는 시내쪽 카페에 가서 저 미국인친구를 위해 체스를 두었습니다. 

심지어는 옆테이블에서 보고 있던 다른 손님(흰옷)도 함께 모여 체스를 두고 12시가 넘어 집에 돌아 왔네요.

비가 내리는 밤, 야외에서 체스를 두니까 그것도 나름 재밌더군요.

저 미국인친구와 그동안 여행도 가끔 다니고 이런저런 대화도 많이 나누었는데, 돌아가서 아쉽더라구요. 저도 해외생활 많이 하다보니 인연이 다 오래가지는 못 해서, 점점 인연의 소중함을 느끼는 중입니다. 

이른아침 사람들이 다람쥐사체 사진을 찍는 이유

오전 6시가 조금 넘은 시각, 어떤 여자분이 다람쥐사체 사진을 찍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우리 동네 이장님도 나와서 다람쥐 사체의 사진을 찍고 있습니다. 

6시가 조금 넘은 이 시각. 무슨 일로 사람들이 다람쥐사체 사진을 찍고 있으면 저는 왜 또 여기에 와서 그 사진을 찍고 있는 걸까요?

아침운동을 가려고 5시 40분경 일어 났는데, 저의 건물전체에 전기가 나갔더군요. 전원박스 열어봐도 메인스위치가 켜져 있는 상태였고, 별다른 이상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6시가 조금 넘어 여느때처럼 시립체육관의 헬스장을 가려고 집을 나섰는데요.

집앞에서 마주친 동네주민 한분이 이 동네전체에 전기가 나갔다면서 이야기를 해 주시더군요. 그제서야 약간의 안도를 하며… 적어도 저의집 전기문제는 아니니까요. 그러면서 이장님이 처리를 하고 있다 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스쿠터를 타고 이장사무소 앞쪽을 가 보니 몇 명의 사람들이 이장님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결론은 다람쥐가 전신주의 뭘 건드려서 폭발음과 함께 정전이 되었다고 하더군요.

저도 호기심에 한번 가 보았습니다. 다람쥐 한마리가 저렇게 죽어 있더군요.

평소 쟤네들은 감전 안 되나 생각을 하긴 했었는데요. 태국에 있을때도  동네 원숭이들이 저런 전신주에도 올라가고 전깃줄 타고 돌아다녀 궁금하긴 했습니다. 

이장님의 발빠른 조치?로 대략 한시간 조금 넘어 전기가 다시 들어왔습니다. 

이 동네 녹지가 많아서 이 다람쥐가 엄청 많습니다. 대학교캠퍼스 내에도 많고, 부근에는 저 다람쥐 이름이 붙은 공원이 있을 정도이니까요.

전기가 나가니까 냉동실의 얼음과 카페자재들에 문제가 생길까 걱정이 되더군요. 좀 불편한거야 감수하면 그만이지만, 장사를 못 하면 안 되니까요. 

최근 생선 먹기를 등한시 했네요.

최근에 태국이야기를 좀 등한시 했네요.

그리고 최근에 저런 생선구이 먹는걸 등한시 했습니다. 

제가 ‘등한시’ 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등한시의 한자가 무엇인지 아시나요? 등한시의 한자 중에서 ‘한’ 의 한자가 중국어에서는 자주 사용됩니다. (물론 등 / 시 는 사용빈도가 아주아주 높은 한자이구요)

생활속에서 저 정도 되는 생선구이한두마리를 먹으려면 한국에서는 적어도 만원 이상은 할 것 같고 대만에서도 거의 만원 가까이 할 것 같은데요.  시골에 사는 태국지인은 종종 저렇게 생선을 직접 집주변에서 잡아 먹습니다. 

태국의 하천, 강에는 덩치 큰 민물생선이 정말 많죠.

우리가 보통 등한시 한다 라는 표현을 자주 쓰는데요. 等閑視 입니다. 

等 같은, 동등한,

閑 한가하다, 할 일이 없다, 관계가 없다

視  보다, 여기다

대략 이 정도의 뜻인데요.

한閑[xian] 은 중국어에서 ‘크게 중요하지 않은’ 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지금 위의 사진처럼 사람들이 강에서 생선이나 잡으면서 시간을 보내는 행위도 저 한자 ‘한’ 을 사용하구요. 저 사람들이 입고 있는 저런 옷들을 표현할 때도 저 한자를 사용합니다.  

쟤는 메기 같은 물고기인가 보네요. 얕은 물이나 진흙 등, 비교적 물 밖에서도 생활을 하는 그런류. 오가다 물고기를 ‘줍기도 하는’ 그런 태국의 시골입니다. 

등한시 하다. 길게 풀어 쓰면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과 동등하게 보다. 이죠. 

그냥 가끔 쓰는 등한시 라는 단어의 한자가 저렇구나 정도 알아두셔도 사는데 큰 도움은 안 되실 겁니다. 

그럼에도 무언가를 배워가고 알아가는 건 좋지 않나요?

비싼 카페가서 비싼 커피 보다는 이런 야외에서 저렇게 한잔 마시는 커피가 훨씬 더 좋습니다. 

생활속의 작은 즐거움과 행복을 등한시 하지 말고 살아야 겠습니다. 

머리에 침대 매트리스를 올린채 자전거를 타는 사람

저의 카페 통유리를 통해서 바깥세상을 바라 보고 있으면 재미있습니다. 여기는 대체로 자전거, 오토바이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많아 짧은 순간이지만 다양한 사람들이 지나 다닙니다. 

며칠전에는 침대매트리스를 머리에 올리고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이 보이더군요. 도대체 저게 가능한가 싶은데 유유히 자전거를 타고 지나갔습니다. 

영상으로 보시면 아주 안정감있게 타고 갑니다. 

최근 여기 대학교가 졸업+여름방학 이어서 많은 학생들이 많은 이삿짐을 옮기거나 캐리어를 끌고 가는 모습은 자주 볼 수 있는데, 저렇게 매트리스를 자전거로 옮기는 모습은 처음이라 공유해 봅니다. 

얼마전에 비 오는날 큰 나뭇잎을 따서 우산처럼 쓰고 지나는 영상을 올린 적도 있습니다.(보러가기) 

최근 여기 대학교가 여름방학이라 거의 대부분의 학생들이 떠난 상태라 좀 한가합니다. 많은 가게들은 방학 2달동안 아예 영업을 하지 않는 곳들도 있습니다. 

태국에서 가슴확대수술 비용

최근 태국지인이 가슴확대수술을 했습니다. 그리고 수술후 사진들을 보내줘서 봤는데요.

저 지인 기존 사이즈가 작은 A 사이즈였다고 하더군요. 평소에는 옷을 입고 브라를 하고 있으면 남자들은 정확한 사이즈를 알 수는 없죠. 가슴확대수술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전 사진들을 보니까 T셔츠를 입은 상태에서 좀 볼륨감?은 없긴 하더군요.

비용은 50,000태국밧(약1,850,000원) 정도이고 예약잡고 오전에 가서 수술하고 오후에 집에 갔다고 하네요. 그리고 일주일뒤인가? 실밥 풀러 가고…

기분탓인지. 가슴수술후 부쩍 저런 스타일의 옷만 입고 야외에나가 사진을 많이 찍는 것 같더군요. 

남자들이 근육키워 몸 잘 만들면 몸 많이 드러나는 옷 위주로 입으려는 것과 똑같은 느낌이겠죠. 

한국지인중에도 가슴확대수술한 사람이 있는데, 만족도가 그렇게 좋고, 남편이 더 좋아한다고 하더군요. 저 지인도 남편은 수술할 필요 없다고 이야기를 했다는데, 하고나면 남편도 좋아할 거라고 확신을 하더군요.

저도 어릴때는 저런류의 성형수술에 굳이? 라는 생각도 조금 있었는데, 살아보니 저렇게 해서 내 인생에 자신감도 가져지고 행복감을 더 느낄 수 있다면 반대할 이유도 없죠. 어차피 인생 한번 사는거 멋지고 자신있게 행복하게 살면 좋죠.

그래서 한국은 찾아보니 대략 500만원 정도 하는 것 같더군요. 

태국에서 200만원 들여 남은 인생 본인만족하며 자신감 가지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뭐 그렇게 비싼 비용도 아니라는 생각이 드네요. 200만원 가지고 해외여행 한 번 하면 그 만족도가 오래가지 못 할 수도 있지만 저런 수술을 해 놓으면 거의 평생 가는 거니까요.

저와는 별개로 태국은 성전환 관련 이야기도 많죠. 제 주변 지인들 중에도 

이성애자 –> 동성애자 로 바뀐 경우가 몇 있거든요. 그리고 남자인데, 여자처럼 사는 사람도 좀 있구요. 작년에는 아주 가까운 남자지인이 동성애자 라고 부모님께 말씀을 드렸더니 어머니가 한참을 울었다고 하더군요. 그렇지만 아들이니까, 이내 또 받아들이고 지지를 하시더군요. 그 남자지인이 저랑 가까운 사이라 그 전에 ‘말투나 행동 등이 좀 여성스러운데’ 라는 생각은 있었거든요.

태국은 남자들이 가슴수술을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저의 차이컬쳐 모토가 ‘어디서 살든 행복하면 그만’ 이듯이, ‘어떻게 살든 행복하면 그만’ 이죠.  

주변에 오지랍 많은 사람들 있죠. 정작 당사자는 잘 사는데 남의 인생을 평가 하려는 사람들. 내 인생 내가 잘 살면 됩니다. 가끔 보면 ‘이렇게 살면 부모님이 실망하시지 않을까 걱정…’ 이런 생각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성인이 되면 부모로 부터 정신적인 독립을 해야죠.

제가 한국드라마는 거의 안 보는 편인데, 대만아내가 한국드라마 보고 있으면 중간중간 보는데요. 지난주에 대만아내가 끝마친 한국드라마에서도 아들 엄마 라는 사람이 아들인생, 며느리인생, 그 주변 사람인생 다 망치고 있더군요. ‘어떻게 키운 내 아들인데’ ‘우리 아들이 어떤 아들인데’ 이러면서…

오늘은 가슴확대수술 후 좀 뭔가 자신감?을 얻고는 사진 엄청 찍고 다니는 태국지인의 이야기를 소개해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