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양이 이던 ‘호미’를 돌봐주시고 키워주셨던 분께서 한국에서 ‘호미’보러 오셨습니다

저희가 대만에 올 때 함께 온 식구가 있습니다. 바로 저희 고양이 호미 인데요. 
한국에서 위의 사진속 분들로부터 입양을 해서 대만까지 함께 왔습니다. 바로 아래사진의

이 녀석이 호미입니다. 
한국에서 입양을 했을때, 이름을 호미로 지었는데요. 호미의 한자가 虎尾 후웨이. 즉 지금 제가 살고 있는 지역의 지명입니다. 저는 아주 이전부터 여기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고, 마침 저 녀석의 얼굴도 약간 호랑이상? 이어서 이름을 호미로 지었습니다. 차이컬쳐시즌1에서 부터 대만시골 이곳에 와서 살거라는 이야기를 자주 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여기 호미의 바로 옆동네에 와서 카페를 하면서 카페의 이름도 호미집, Homi house로 지었죠.

무튼 그렇게 여기서 호미와 살고 있는데, 그전에 호미가 길고양이었을때부터 오랫동안 돌봐주시고 호미를 입양해서 키워주셨던 분께서 호미를 보려고 한국에서 저의 카페까지 와 주셨습니다.  호미를 안고 있는 모습입니다. 

저희가 입양한지 2년이 넘었지만, 그 동안 단체대화방을 만들어서 계속 연락을 하고 있었고, 한국에 있을때는 만나기도 했었습니다.

 

한국에서 여기까지 오셨는데, 호미의 이름 기원인 이 곳, 虎尾鎮 후웨이에는 와 봐야죠. 그래서 모시고 왔습니다. 여기 후웨이의 상징물인 호랑이상 입니다. (고양이 아님 주의)

후웨이는 이전 일제시대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 곳으로 아직도 보존이 잘 되어 있어 둘러보시면 약간 시간여행을 하는 기분이 드는 곳입니다. 

연말에 저를 방문해 주셨던 두 팀의 한국분들 모두 여기 모시고 왔는데, 좋아 하시더군요.대만단기여행하시는 분들은 짧은 일정때문에 타이베이와 그 주변만 돌아 보시지만, 대만의 중남부도 볼 거리가 많습니다. 

그리고 엽서에 손편지도 주셔서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연말에 두팀의 한국분들이 저의 카페를 한국에서 찾아주셔서 정말 반가웠습니다. 해외에 오래 사시는 분들은 가끔 한국에서 손님 찾아오면 얼마나 반가운지 잘 아실 겁니다. 특히나 제가 있는 곳은 타이베이 같은 수도, 대도시도 아니라 아무래도 접근성도 떨어지거든요.

2024년이 시작되었습니다. 

늘 한해한해 후회하지 않도록 많은 걸 해 보며 살고 있습니다. 올해도 다양한 많은 것들을 하면서 더 재미있는 해외생활 이야기 올려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대만윈린현에서 참가한 자영업 전시회 활동 이모저모

지난 12월 24일에는 제가 사는 대만윈린 더우류시에서 자영업자, 소상공인, 청년창업 자들의 야외활동이 있었습니다. 
주최측에서 마련한 장소에 30여개의 자영업자들이 각자의 부스를 꾸며 손님들에게 홍보를 하는 그런 활동이었습니다.

위의 사진처럼 저의 카페도 참가를 해서 홍보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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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를 하기 대략 한달전부터 등록을 하고 주최측에서 주관하는 회의도 참석을 했었습니다. 주최측은 이 지역 대학생들과  이 지역에서 이런저런 정치관련 일도 하고 경제인들과도 협력하고(이런 사람을 뭐라고 해야 하는지…) 이런저런 지역사회에서 영향력?을 키워 나가는 그런 사람이 후원을 하는 것 같더군요.

이번 활동의 모토인 一起辦市集 라는 문구에 각자의 방식대로 색칠을 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태극기를 그려 넣었습니다. 

행사당일에는 저렇게 전시를 해 두더군요. 제가 그림솜씨가 없어서 태극기가 조금 비뚤어진 것 같은데, ‘예술의 영역?’ 으로 봐 주면 감사하겠습니다. 

몇주전부터 참가자들이 모여 어떤 식으로 활동을 하고 어떤 제품을 어떻게 홍보할 건지에 대해 회의를 했었는데, 분위기를 보니까 몇몇은 이런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능숙하게 준비를 잘 하고, 또 다들 2인이상으로 참가를 하더군요. 저는 행사당일 아내가 카페를 봐야해서 원래는 혼자서만 참가를 하려 했었거든요. 여기 연고도 없어서 도움을 청할 친구나 지인도 없어 기획초기에는 저 혼자서 행사를 하려 했었습니다. 다른 참가업체의 안을 보기 전까진 말이죠…

저는 이런 활동도 처음이고 어떻게 무엇을 준비를 해야할지, 또 나의 부스만 너무 초라하게 보이진 않을지, 다른 부스는 사람이 많은데 나의 부스는 썰렁하진 않을지 등등… 살짝 걱정이 되더군요. 이왕하는거 남들보다 더 잘하고 싶지, 못 한다는 소리 듣기는 싫거든요.

그래서 저는 저의 카페 컨셉인 “한국음식과 문화” + “태국음료” 를 현장에서 소개하기로 기획을 하고 저의 태국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아무래도 혼자서 하기에는 너무나 어려움이 있더군요.

드디어 행사당일… 며칠간 흐리고 추운 날씨가 거짓말처럼 화창하고 포근해졌습니다. 

주최측직원들도 분주히 움직이고, 참가업체들도 분주히 준비를 하더군요.

최대한 남들보다 안 꿀리게? 부스를 꾸미려 했습니다. 기업에서 전시회부스를 꾸며봐도 좀 성의 없는 부스가 있고, 잘 꾸며진 부스가 있어서 성의 없어 보이는 부스는 발길이 가질 않습니다.

이왕하는거 잘 해야죠. 

저의 태국친구가 재료와 기구들을 가지고 와서 잘 꾸며 주었습니다. 꾸미기만 잘 한 것이 아니라 음료도 꽤 많이 팔았습니다. 

시선을 끌려고 스트라이다도 가져다 두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손님들이 ‘한국인이 어쩌다 여기에서 카페를 하게 되었냐?’ 라고 질문을 많이 하시는데, 그럴때마다 스트라이다 타고 타이베이에서 대만남단까지 종주한 이야기를 해 줍니다. 

드디어 첫 손님이 태국음료를 주문했습니다. 

저 태국친구의 태국카페가 외부노점형 스타일이라 이런 환경에서 음료를 잘 만들더군요. 저 친구의 카페운영경험이 여기서는 빛을 발하더군요. 만약 제가 저기서 음료를 만들었으면 엄청 버벅거렸을 것 같습니다.

저는 책갈피에 오시는 손님들의 이름을 한글로 적어 드리는 이벤트를 했으며, 저 책갈피를 다음에 가지고 오면 모든 음료 20% 할인행사도 했습니다. 

반응이 좋더군요.

그리고 저의 카페 달고나를 포장해서 제공을 해 드렸는데요. 달고나도 대성공이었습니다. 모두들 맛있다고 하시더군요. 

저의 부산집 바로 앞이 공터(최근엔 놀이터)였는데, 제가 초등학생때 항상 거기 달고나(부산에서는 쪽자 라고 불렀습니다) 아저씨가 판을 깔고 달고나를 팔았죠. 당연히 저도 쪽자 엄청 만들어 먹었던 기억이 있고, 그 맛도 정확히 기억을 합니다. 

제가 기획한 것들이 반응이 좋아 보람을 느꼈습니다. 

저의 카페 주변 한국식당의 대만인사장과 이번에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습니다. 그 사장님은 떡볶이를 현장에서 판매하고 홍보하시더군요.

주최측 직원들 사진입니다. 토끼들고 있는 여자분과 다른 여자분도 자신이 만들 수 있는 음료도 나눠주고 집에서 입던 옷가지를 가지고 와서 팔고 있더군요.

저 주최측 직원들이 모두 저의 카페옆 대학교학생들인데요. 아마도 대학생때 이런 사회활동을 통해서 학교생활 커리어를 쌓아 가려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대학생때 이런 학창생활을 다양하게 해 보는 것이 보기 좋지 않나요? 책상에 앉아 공부만 하거나 주구장창 술만 마시는 그런 대학생활은 별로 입니다. 

저 여학생들은 KPOP에도 관심이 많은지 한국노래가 나오면 가사도 흥얼거리면서 춤도 따라 추는 등 끼와 재능이 있어 보였습니다. 

저의 이웃부스, 태국친구와 함께 찍은 샷입니다. 저의 이웃부스 커플은 저런 화분을 키워 판매를 하더군요. 

아래에는 행사장, 사진위주로 올려 보겠습니다.

어떤 물건을 팔든, 무슨 장사를 하든, 결국은 사람이죠. 나이가 많든 나이가 적든 남녀할 것 없이 모두 모여서 하루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특히 이 곳 분들이 저와 태국친구 두 명의 외국이이 나와서 하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 주셔서 많은 분들과 이야기도 나누었고, 음료도 꽤 많이 팔았습니다. 

보다 더 많은 분들이 저의 카페를 알고 찾아주셨으면 하는 마음도 큽니다. 아무래도 장사를 하다보니 매출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저의 아내와 태국친구와 함께 준비를 잘 해서 처음 하는 이런 행사를 잘 마무리 할 수 있었습니다.  해외에서 이런 활동을 해 본다는 것이 특별한 경험이죠. 

늘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경험을 하며 살 수 있음에 감사를 합니다. 

제가 살고 있는 대만운림雲林의 풍경들

운림현雲林縣은 대만중부, 타이중과 타이난 중간,에 위치를 하고 있는 다른 현縣(한국의 도)보다는 덜 발전된 지역입니다. 주변에 타이중과 타이난, 그리고 짜이 라는 큰 도시가 있어서 여기는 여전히 좀 발전이 더딘 지역입니다. 이런 발전지표는 굳이 도별1인당수입지수 나 경제지표 같은걸 찾지 않더라도, 대형백화점, 대형쇼핑몰, 대기업대리점유무 등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IMAX 영화관도 없어서 인근 도시로 가야 하죠.

이전 일제시대때 관공서로 사용되었던 건물을 그대로 활용하여 스타벅스와 서점이 입점되어 있습니다. 내부를 들어가보면 이전의 소품이나 그 당시 벽면이 그대로 보존이 되어 있습니다. 여기가 소방서였는데, 내부에 보면 2층에서 1층으로 내려가는 봉도 있고, 망루도 저렇게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여기 3층 4층 높이면 아주 멀리까지 볼 수 있었을 것 같네요.

여기는 이 설탕공장이 유명했습니다. 일제시절 일본이 이 지역의 사탕수수를 정제해서 설탕으로 만들어 수송을 했던 곳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 물자수송을 담당했던 철로의 흔적도 남아 있습니다.

얼마전 태국소개글에도 일제시대때 물자운송을 담당했던 기차사진을 올린 적도 있고, 제가 자주 소개했던 태국 콰이강의 다리에서도 일제시대 물자운송 기차 사진을 올린 적이 있는데요. 하여튼 이 일본 이 녀석들은 힘 믿고 엄청 수탈해 갔죠. 이전에… 다시는 저런 짓 못 하도록 눌러줘야 합니다. 역사는 늘 반복이 되고, 저 녀석들은 언젠가 또 전쟁을 통해 영토확장을 하려 할 겁니다.

지금은 철로만 남아 있고 저 다리위의 철로는 일종의 관광지가 되어 사람들이 기념사진을 찍는 곳이 되었습니다.
저의 아버지도 이전에 일본놈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철로도 깔아주고 전기도 놓아 주고 해서 우리가 발전할 수 있었다 로 알고 있었다가 최근에는 완전히 ‘간사한 일본쪽바리 새끼들’ 이라며 일본이야기만 나오면 쌍욕을 하는 상태로 바뀌었습니다.
이전에 일본이 와서 우리나라가 발전할 수 있었다 라는 dog소리를 하시길래 그때 너무 짜증나서 아버지한테 한바탕 한 적도 있거든요.

여기는 이런 조형물이 있을 정도로 사탕수수가 유명한 지역입니다. 저걸 수탈해 가려고 철로를 깐거죠. 군산에 보면 쌀 수탈해 가려고 철로 깔았듯이…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일본이 철로를 깐건 한국/대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지네들 경제적이익을 위해 수탈하려고 깐 것입니다.

그 설탕공장 주변에는 당시 거주했던 일본놈들을 위한 숙소건물이 있습니다. 지금은 형체만 남겨 놓고 보존해 둔 상태입니다.

이렇게 보존이 잘 된 건물들도 있습니다.
이 주변에 많은 일본인들이 거주를 해서 곳곳에 일본건축물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이전 대만에 살았던 사람들은 일본에 대한 반감이 한국/중국처럼은 없습니다. 오히려 본토에서 온 국민당 때문에 더 힘들었다고 하죠.
하지만 한국은 다릅니다. 힘으로 인한 주권침탈을 당했고, 무력으로 공포정치를 했으며 창씨개명, 언어말살 등으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없애버리려고 했었죠.
올해 세상을 떠나신 저의 할머니… 제가 아주 어릴때 할머니는 제가 말 안 들으면 항상
“순사가 와서 잡아 간다” 라며 일본순사에 대한 두려움을 늘 가지고 계셨습니다.

이 건물은 다수의 인력이 함께 모여살았던 기숙사 건물입니다.
외국으로 인력을 보낼때는 상위관리인도 보내지만 현장관리인력도 함께 보내니까요. 여기는 일반관리인력이 함께 머물던 곳으로 생각이 됩니다.

글 쓰다보니 살짝 열받네요.
우리나라의 근현대사에서 가장 큰 잘 못 중 하나는 전쟁이후 미군정이 통치를 하면서 일제시대 친일파 청산을 못 하고 오히려 그 당시 일제 앞잡이를 했던 세력을 다시 고위관리로 임명한 건데요.
첫단추가 잘 못 끼워진 상태로 지금까지 오다보니 뭔가를 바로 잡아야 하는데, 바로 잡기가 너무나 어려워진 상황이 되어 버렸고 청산의 대상이 사회의 권력층이 되어 버린 그런 상황이 되어 버렸습니다.

녹이 쓴 대문입니다.

상상을 해 보면, 이전 일제시대에는 사탕수수밭에서는 많은 농민들이 그걸 수확하고 설탕공장으로 운송을 해서 공장에서는 설탕을 만들어 항구로 실어 나르며 그 주변에는 많은 식당과 술집, 상점들이 있었을 겁니다. 그런 도시가 지금처럼 넓지는 않았겠지만, 저 설탕공장 주변으로 어느 정도로 형성이 되어 있었을 것이고, 그런 흔적들이 저 지역을 돌아다니다 보면 곳곳에서 보입니다.

주변을 보면 아주 오래전에 사용되었을 것 같은 간판들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이런 것들로 부터 당시의 흔적들을 엿볼 수 있습니다.
우측부터… 통조림류, 술담배, 사탕과자류, 소금, 기름 양념류…

어쩌면 당시에는 지금의 편의점 같은 그런 역활이었을 것 같습니다.

그 일본인 거주지역 주변으로는 이런 주택가가 형성이 되어 있습니다. 비교적 최근에 지어진 주택입니다. 딱 봐도 면적이 아주 넓어 보이는 주택입니다. 대도시에서는 땅이 너무나 비싸서 쉽게 볼 수 없는 규모의 단독주택입니다. 서울 방배동에 있는 저런 대형주택을 들어가 본 적이 있는데, 딴 세상 온 것 같은 느낌이더군요. 당시 집주인이 가장 큰 크기의 TV를 놓아 두었는데, 이쪽 쇼파와 TV간의 거리가 너무 머니까 TV가 작아 보이는 효과?도 있을 정도로 TV드라마에서나 나오는 그런 집이었습니다.

주택들이 개성있고 멋있습니다.

여기 일제시대 주택들지역은 현재는 비어 있고, 가끔 관광객들이 와서 보고가는 곳입니다. 일부러 이걸 보러 운림까지 올 단기관광객은 없겠지만, 운림을 지나간다면 쉬면서 둘러보기에는 괜찮은 지역입니다. 사실 여기 운림은 대만사람들 중에도 와 보지 않은 사람들이 많더군요.
제가 여기서 카페를 열고, 이 지역 이전에 와 본적 있냐고 물어보면 10에 9은 처음 왔거나 왔어도 다른 일이 있어서 잠깐 들리거나 정도지 일부러 무슨 관광을 위해 와 본 적은 없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오히려 기회는 사람들이 많고 이미 발전된 곳보다는 지금보기엔 조금 덜 발전된 곳에서 더 많을 수가 있습니다. 이미 발전되고 포화가 된 곳에서는 더 많은 경쟁과 더 많은 비용, 투자가 수반이 되어야 자리를 잡을 수 있는 반면, 아직 덜 발전된 곳은 어느 정도는 아이디어와 희소성, 장기적 안목 등으로도 자리를 잡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곳으로 온 이유이기도 하구요.

대만 운림현에서의 생활이 아직까지는 만족스럽습니다. 현재 주변의 가족친척들은 우려했었고, 걱정했었고, 지금도 왜 도시에서 살지 않나? 라는 시각으로 바라보는걸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늘 살아오면서 남들이 ‘보편적’ 이라는 것들에 의문을 가지고, 남들이 ‘평균적’ 이라는 것들에 의심을 가지며 살아 왔습니다. 왜 꼭 남들처럼 살아야 하지? 라는 생각도 많이 해 왔습니다.
SNS에서보면 남들이 하는것 따라하며 살고, 남들이 가지는것, 남들이 하는것 안 하면 뒤처진다고 생각하며 불행해 합니다. 남들처럼 하지 않으면 ‘소속감’을 잃어 버릴 것 같고…

살아보니 굳이 그렇게 안 살아도 되더군요. 내 인생은 내가 설계해서 살면 되는거고, 그 남들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자세히 보면 그다지 현명하지 못 하더라구요.

멋진 편의점, 프렌차이저 점주라도 인생이 고달프고 경제적으로 늘 어려운 사람들이 많죠. 사장입네 라며 살아도 자영업자의 대부분이 사업장을 금방 접습니다.
저도 카페를 열고 벌써 손님이 한자리 수로 온 날이 며칠 될 정도로 잘 될땐 잘 되지만, 안 될땐 지독스럽게 안 되는 것이 자영업이구요. 카페사장? 뭐 부러워 하실 분도 계시겠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절 부러워 하실 분들은 손님이 없을땐 그냥 저렇게 의자에 기대어 잠을 잘 수 있는 ‘여유’를 부러워 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저도 손님 없으면 저렇게 기대어서 잡니다.
시골점빵하면서 저런 여유라도 있어야죠. 대도시 편의점 직원과는 다릅니다.

오늘은 설탕공장 일본인주거지역 위주로 소개를 해 보았는데, 다음에는 여기 일제시대 일본군의 군부대숙소건물지역을 소개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