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그 고택을 들어가기 전에 그 고택 주변에 있는 사진촬영명소를 하나 소개해 봅니다. 이렇게 오래된 차량이 있는데 지금은 사람들이 사진찍으러 오는 장소가 되어 버렸습니다. 주변 오래된 건물과 어울려 나름 분위기 있습니다.
또 그 주변에 마을주민이 키우고 있는 거북이를 데리고 나와 산책 시키고 있고, 그걸 지켜보는 아이 입니다.
주변은 좀 오래된 건물들이 많고 현지 주민들의 이런저런 사는 모습들을 볼 수 있는데요. 오토바이가 멋집니다. 이렇게 동물머리뼈로 오토바이 장식한걸 이전 태국의 수코타이 지방갔을때도 한 번 본 것 같네요.
건물외관은 누가 봐도 ‘나 중국식 이야’ 라고 느끼게 해 줍니다. 240년전의 원형이 다 남아 있을것 같지는 않고 중간중간 유지보수를 했겠죠. 특히 저런 240년전 외벽의 그림이 저렇게 선명하기는 어렵습니다.
중간의 저 수영장도 나중에 만들었는데, 은근 이런 고택과 저런 수영장이 이질감없이 융화가 되는 모습입니다.
오히려 수영장의 물색깔이 고택과 잘 어울려 사진찍기 좋습니다.
여기는 주인이 이 고택을 ‘활용’해서 수입을 올리고 있는데요. 보니까 뭐 거창하게 하는것 같지는 않고, 있는 건물을 그대로 활용해서 간단한 음료를 팔고 있었습니다. 제가 태국에서 이런 100년 200년된 고택들을 몇 군데 가보면 그걸로 무언가 장사를 해서 수입을 올리는 후손들이 있거든요.
조상들이 이런 집과 땅이라도 물려주었다면 후손의 입장에서는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저기 음료를 마시고 있는 분들은 태국분들이시고 방콕에서 살고 있는데, 구경을 왔다고 하시더군요.
2층 내부에 들어가면 조상의 사진으로 유추되는 사진들이 좀 걸려 있고, 공간은 그대로 보존이 되어 있습니다. 건물의 규모를 보았을때는 그 당시에도 조금은 경제적으로 상위층의 가족들이 아니었나 추측해 봅니다.
그리고 태국이 덥다고 하지만, 이런 이전 고택들을 가보면 통풍이 잘 되어서 시원합니다.
이전 시골마을 기와집 가보면 집 뒤에 낮은 산이나 언덕이 있어 마루쪽과 뒷쪽의 문을 열어두면 산에서 내려오는 시원한 바람에 마루나 방에 앉아 있어도 그렇게 덥지 않은 것처럼 말이죠.
주인가족은 1층 저기서 생활을 하는 것 같습니다.
대저택이지만 실제 사용하는 공간은 1층의 저 곳입니다. 아마도 이전에는 대가족이어서 이런 큰 집과 많은 방이 필요했겠지만 지금은 딱 저정도만 되어도 도심의 원룸에 비하면 저택인 셈이죠.
세상을 돌아다니며 많은 경험을 할 수록, 서울에서 단칸방 좁은 원룸에서 생존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런 좁지 않은 국토를 놓아 두고 저게 뭐 하는 짓인가? 라는 생각이 들때도 있습니다. 도심집중화가 가지고 온 어두운면이 아닌가 생각을 해 봅니다.
많은 사람들 속에 살고 있지만, 정작 고립된 단칸방, 원룸에서 사람과의 교류를 하지 않고 그 비싼 방값을 위해 인생을 희생해야하는 구조…
오늘은 방콕의 차이나타운 인근에 있는 200년이 넘은 고택을 소개해 보았습니다.
이 고택과 주변의 모습은 조만간 저의 유튜브채널에 더 자세하게 올려 보겠습니다.
이전에는 차이컬쳐만 운영을 해서 사진만 찍었는데, 최근에는 사진도 찍고, 영상촬영도 하려니 더 어렵습니다. 특히 영상촬영 기술이 부족하고, 아직도 고프로의 그 조그만한 액정으로 어떻게 화면을 보고 촬영하는지 궁금합니다. 다른 여행유튜버들은 고프로로 본인촬영도 잘 하던데, 저는 촬영하고 보면 제 얼굴이 반쪽만 찍히고 있다든지…
제가 9월달에 태국가서 찍은 많은 영상들이 이런저런 이유들로 촬영결과물이 좋지 않아 거의 다 사용하지 못 해 정말 안타까웠거든요. 아무튼 최근에는 블로그와 유튜브의 과도기?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대만 저의 집 근처에 있는 홍콩사람이 운영하는 홍콩식식당을 다녀 왔습니다. 이 분들이 저의 카페에 오셔서 매출도 올려주신 적이 있어서 그에 대한 답례? 상부상조? 의 의미로 방문을 한 것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찾아 와 주셔서 식당소개도 해 주시니 이 지역에도 ‘홍콩식식당’ 이 있구나 라고 알 수도 있는거죠. 당시 인천-홍콩은 노선이 많아서인지 가격도 더 쌌던걸로 기억합니다.
저는 업무상 홍콩을 많이 가거나 경유했었습니다. 심천고객사 방문을 자주 했었는데, 2000년대 초반에는 인천에서 심천 직항이 없어서 항상 홍콩으로 경유하기도 했었고, 심천직항이 있더라도 어떨때는 일부러 홍콩으로 나오기도 했습니다. 왠지 홍콩은 그 느낌이 좋았거든요.
2000년대 초는 그럼에도 홍콩의 느낌이 남아 있었고, 홍콩의 거리를 걸어다니며 구경하는 재미도 있었고, 주택가골목 돌아다니는 재미도 있었습니다.
특히 주택가 골목에 가면 남자들은 웃통을 벗고 일을 하는 모습도 많이 볼 수 있고, 삼삼오오 마을모퉁이에 모여서 동네사람들이 이야기 하고 노는 모습도 볼 수 있었죠.
아쉽게도 홍콩은 업무상 참 많이 갔었는데, 늘 출장업무에 대한 걱정, 돌아가서 보고할 것에 대한 걱정, 고객사의 요구를 못 이룬 것에 대한 걱정 등등으로 제대로 즐긴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가장 마지막으로 홍콩을 간 것이 2012년도?인가 그 전후였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홍콩의 2층트램을 로고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어릴때 보던 홍콩영화 포스터를 붙여서 홍콩의 느낌이 조금이나마 나도록 해 두었습니다.
어릴때 즐겨 봤던 강시영화 포스터 입니다. 어릴때는 홍콩영화제목이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중국어를 배우고 나서는 알게 되었죠.
개심귀 開心鬼 開心 은 즐거운, 행복한 이라는 뜻이고 鬼 는 귀신이라는 뜻입니다.
연령대가 조금 있으신 분들은 복성시리즈를 아실텐데요. 홍금보, 성룡, 원표 트리오는 당시 최고였죠.
夏日福星하일복성, 福星高照복성고조 등등 복성시리즈가 있었던 걸로 기억하고 저는 거의 다 보았습니다.
福星은 행운의신 정도로 해석을 하면 될 것 같구요.
夏日 은 여름, 여름날 이죠.
福星高照 라는 단어는 지금도 대만의 문이나 담벼락에 많이 붙어 있을 정도로 널리 사용되는 단어인데요. ‘행운의 신이 하늘에서 지켜 주시길’ 이라는 뜻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음식도 맛있었습니다.
제가 홍콩에 살았던 건 아니지만 광동식음식도 심천에 있으면서 많이 먹었었거든요.
2000년대초의 홍콩은 그 느낌이 참 좋았는데 사람들이 지금은 중국화가 많이 되었다고 해서 일부러 홍콩을 가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매주 저의 카페를 찾아 주는 홍콩유학생이 있어서 홍콩식중국어는 매주 듣고 있긴 합니다.
태국 다녀 오느라 거의 한달이상 차를 방치해 두었다가 어제 오후에 세차를 했는데, 귀신같이 오늘 오전에 비가 조금 내렸습니다.
이번에 한국갔다가 집반찬을 조금 가져 왔습니다. 저는 외국에서 한국음식을 고집하지는 않는 사람이고 대체로 현지음식을 잘 먹는 스타일입니다. 그럼에도 가끔 한국에서 가져온 반찬을 먹으면 좋죠.
이번에 태국에 가니 저 유명한 식당주인 Jayfai와 신라면이 합작해서 만든 똠양신라면이 있더군요. 그래서 몇 개 사와서 먹어 보았습니다.
음식을 하는 과정에서 연기가 많이 나서 고글을 쓰고 요리하는 모습이 하나의 상징이 되어 버린 분인데요. 저는 이 분을 음식다큐를 통해서 알고 있었죠. 태국에서 한번 가봐야지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줄을 서야 한다는 부담감에 미루고 미루다 지금은 블랙핑크 리사도 찾아가는 유명인이 되었습니다.
신라면과 똠양의 맛이 잘 어울리고, 가끔 먹으면 기분전환도 되는 그런 맛입니다.
볶음면도 판매를 합니다.
제로콜라 오리지널맛은 대만에서든 태국에서든 냉장고에 항상 있습니다. 거의 하루에 한두개 정도는 마시는 것 같은데요.
이번에 한정판으로 나온 K-WAVE 제로콜라도 마셔 보았습니다. 아무튼 콜라에 뭐 단맛, 향기 들어간것 치고 입맛에 맞는 건 아직까지는 없었습니다. 그냥 오리지널 제로콜라가 가장 입맛에 맞네요.
오늘은 태국의 방센해변도시에 있는 어느 카페구경을 해 보겠습니다. 방센해변을 가게 된 이유는 거기 대형국립대학교가 있다고 해서 태국의 대학교상권은 어떤가 싶어 한번 둘러보았습니다.
제가 카페를 하기전부터 저는 어딜 돌아다닐때 상권 등을 유심히 보는 편이었고, 그런 내용들을 차이컬쳐에서도 많이 소개를 했었죠.
해변도시답게 대학교 간판 앞에 서핑보드가 있습니다.
제가 워낙 좀 덜 발달된 지역 위주로 거주를 해서 그런지, 이 도시는 작지만 깔끔하게 인상이 좋더군요.
해변가에 살면 좋죠. 부산 살 때 광안리해변에서 산 적이 있는데 좋습니다. 특히 광안리해변처럼 편의시설이 잘 되어 있는 곳이면 더 좋죠.
태국도 이런 해변가에 살면 삶의 질이 올라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전이라 아직 해변에 사람은 많이 없었으나, 파라솔의 수를 보니 사람 엄청 몰리겠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전 정보 없이 그냥 해변가와 대학가 주변을 천천히 걸어 보았습니다. 저의 대만카페 주변 대학가처럼 학생들 숙소건물들이 엄청나게 많더군요. 그리고 학생들이 많으니 그 학생들의 소비를 뒷받침할 각종 크고 작은 가게들도 많았습니다.
이른아침부터 걷다보니 식사를 해야 할 것 같아서 장식하나 없는 시멘트건물에서 영업하는 식당을 들어가 보았습니다. 여기는 저 닭을 우려낸 육수면요리가 메인인듯 하더군요. 상당히 맛있었습니다. 특색있더군요.
다시 걷다보니 저 고양이가 ‘날 따라 들어와’ 라는 표정으로 저기 카페로 들어가더군요. 그래서 더위도 좀 식히고 다리도 쉴 겸 들어가 보았습니다. 사실 고양이 때문에 따라 들어간 건 아니고, 돌아다니면서 내가 생각하는 컨셉과 비슷한 형태의 카페라서 들어가 본 겁니다.
마침 오픈시간이더군요. 제가 첫손님인듯… 사람들이 청소를 하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실내 실외 꽤 넓습니다. 그리고 인테리어 아웃테리어 모두 돈을 좀 많이 쓴 듯한 모습입니다.
일단 더워서 시원한 음료 하나 시켜 보았습니다.
가만히 보니 전문 촬영팀이 카페홍보용 영상과 사진을 찍고 있었습니다. 속으로 ‘개업한지가 얼마되지 않았나 보다’ 라고 생각을 했죠.
어떤 식으로 촬영을 하는지 보고 싶었습니다. 저도 가끔 카페홍보사진이나 신메뉴 사진을 찍지만 저는 그냥 저런 전문 조명장비 없이 자연채광에 휴대폰으로 찍어서 올리거든요. 저렇게 전문적으로 해 본 적이 없던 터라 좀 지켜 보았습니다.
카페 홍보촬영하는 영상은 위 저의 유튜브채널에 올려 두었습니다. 영상으로 보시면 더 자세하고 재밌습니다.
좀 오래 앉아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따뜻한 커피한잔 더 시켰습니다. 저는 원래 따뜻한 커피를 더 선호하는 편이거든요.
음료를 마시는 모습을 촬영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물어보니 저기 촬영하는 사람들도 친구들이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주방에서 일을 하는 스텝중에도 친구가 있다고 했습니다.
참 저기 여자분이 카페사장님 이시구요. 촬영현장을 보았는데 시종 웃으면서 밝은 분위기속에서 진행을 했습니. 유튜브영상에 잘 나와 있습니다.
사장님이 직접 음료장식 하는 모습도 보여 주시더군요.
제가 홍보촬영하는 모습 촬영해도 되냐고 하니까, 아주 흔쾌히 촬영해서 홍보해 달라고 하더군요.
사실 저도 저의 손님들이 저의 카페 촬영해서 SNS상에 올려 주시는 것이 가장 감사하거든요. 며칠전에는 어느 손님께서 영상으로 인스타그램에 올려 주셨더라구요. 자영업을 하시는 분들은 이런 것들이 얼마나 감사한지 잘 알 겁니다.
그리고 마당에 있는 망고나무에서 망고를 따는 모습입니다. 여기 저의 대만카페 주변에는 대략 6월 전후로 망고가 엄청나게 열립니다. 가로수마저도 망고나무 거든요. 그 비싸다는 망고가 땅바닥에 굴러 다닙니다. (정말입니다)
여기도 저녁무렵 사람들이 저런 긴 채를 가지고 나와 망고를 따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딱 저렇게…
카페도 하면서 종업원들이 저렇게 망고도 따고, 또 촬영하는 친구들 불러서 함께 영상촬영도 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저렇게 사람이 복작복작한 것도 보기가 좋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저는 여기 대만에서 제 아내와 둘이서만 모든 것을 다 하다보니 아무래도 좀 저런 분위기가 나지는 않거든요.
정말 다행스럽게 카페스텦중에 중국어를 잘 하는 스텦이 있더군요. 중국어전공이라 중화권기업에서 오래 일을 하고 지금은 친구도와서 카페에서 일을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딱 저와 비슷한 케이스 인데요.
자칫 말이 통하지 않아 겉모습만 보고 돌아갈 뻔 했는데, 중국어를 하는 스텦이 있어서 카페에 대한 이런저런 내용들을 들어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때문에 빨리 태국어를 배워야 합니다. 여행을 하면서 현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어 보고 싶거든요.
여사장님이 시종 잘 웃고 친구들과 장난도 많이 쳐서 내부사정이야 어떻든 간에 밝아 보여 좋았습니다. 개업한지는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이렇게 새로운 도전을 하는 자영업사장님이 잘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네요.
오늘 저의 대만카페 지역날씨는 구름이 많이 낀 흐린 날씨입니다. 딱 한국의 가을기온 이네요.
3주여만에 태국에서 대만으로 돌아왔습니다. 3주동안 태국-한국-태국 이렇게 돌아다니다보니 마음은 엄청 오래 집을 떠난 듯 한데, 막상 대만집을 돌아와보니 기존일상과 똑같습니다. 그동안 달라진건 이웃집 아저씨가 저렇게 분재를 해서 놓아 두었네요.
저 이웃집아저씨가 나무가지고 뭘 만드는걸 좋아하고 또 특이하게 생긴 나무를 어디서 구해와서 다듬어 놓곤 했습니다. 기존에도 자신의 집에 몇그루 분재를 해서 놓아두곤 했는데, 이번에 이렇게 다량의 분재를 만들었네요.
판매의 목적인지 개인감상용인지는 모르겠지만 화분화초 가꾸는 것이 생활에 어느 정도 여유가 있어야 가능하거든요.
태국은 연일 35도가 넘는 무더위였는데, 한국가니 눈발이 내릴 정도로 추웠다가 다시 태국가서 35도의 무더위를 경험하다가 대만에 도착을 하니 아주 상쾌한 20도 전후의 상쾌한 가을날씨가 펼쳐지더군요.
그리고 방콕의 그 복잡한 사람들, 차량들, 뚝뚝이, 오토바이들 속에서 지내다가 저의 대만집으로 오니 뭔가 딴 세상에 온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타오위안공항에서 고속철도를 타고 가는데, 한무리의 초,중,고등학생들이 인솔교사와 함께 큰 배낭을 메고 탑승을 하더군요. 모두 등산을 한 듯 큰 배낭과 흙에 젖은 등산화가 있었습니다.
옆에 앉은 학생에게 물어보니 3박4일로 등산하고 야영을 했다고 하더군요. 밤에는 꽤 추웠다고 했습니다.
태국에서도 저런 배낭을 멘 여행객들을 많이 봤거든요. 살다보니 언젠가부터 바퀴달린 케리어만 끌고 여행을 했지, 저런 배낭 안 메어 본지 꽤 되었구나 라는 생각을 기차에서 잠시 해 보았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젊은시절의 기분을 낼 수 있는 배낭메고 하는 여행을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긴 했습니다.
저의 차이컬쳐 메인페이지에 있는 그 그림도 앞뒤로 배낭을 메고 여행할 때 찍은 사진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거든요.
기존에는 그냥 광동성에서 온 사람으로 퉁쳐서 이야기를 했었는데, 광동성에서도 저렇게 지역을 나누어 구분한다는 건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당시에 이런 형태의 범선을 타고 동남아등지로 무역을 했었다고 합니다. 이런 무역을 하다가 난파를 당해 실종된 사람도 많고, 그 당시에 각 나라별로 난파된 사람들을 모아서 관리하는 곳들도 있었다고 하구요. 조선시대의 사람들은 중국만큼은 아니지만 일본, 청 등지로 해상무역을 하던 사람도 있고, 그 와중에는 난파를 당해 일본-필리핀 으로 일찍부터 해외의 발달된 문물을 보고 온 조선사람들도 있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조선도 좀 더 일찍부터 청/일분뿐 아니라 더 넓은 세계로 해상무역에 눈을 떴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죠. 네델란드표류인이 자국에는 대형선박이 엄청나게 많이 있다고 하자 허풍이라고 조선왕뿐아니라 고위관리들이 비웃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바로 위 사진을 보면 남자는 중화권사람이고 여자는 태국쪽 사람인 것 같습니다. 보통 태국쪽 여자들이 저렇게 옷을 입으니까요. 그리고 저 당시에 중화권-태국사람간의 혼인도 있었다고 하며 1909년도 부터인가 아버지가 중국사람이면 해외에서 출생한 아이도 중국국적을 따르게 한다는 법이 제정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화라는 것은 대체로 한쪽방향으로만 영향을 끼치지 않습니다. 서로가 영향을 받기도 하고, 어떨때는 두개의 다른문화속에서 다른 형태의 문화가 형성이 되기도 하죠. 언어도 마찬가지로 두개의 다른 언어가 공존하는 지역에서는 상호간섭을 일으키기도 하고, 기존에 없던 언어나 문자형태가 생성된다고도 합니다.
당시 중국에서 온 노동자들의 삶은 많이 힘들고 고달펐다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기술이 안 되어 있어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집떠나서 객지에 사는 것 만으로도 힘든데, 이런 먼 해외에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육체노동을 하는 삶은 지금의 저로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인형으로 잘 묘사를 해 두었네요. 그 당시의 병원의 모습이라고 합니다. 육체노동자들이 혼자살면서 병치레 하는 경우가 많아 중화식병원을 설립해서 운영을 했다고 합니다.
약탕기가 있는걸 봐서는 중의의원 인 것 같네요.
아울러 늘어나는 중화권이주자들의 자녀들의 교육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학교도 설립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태국 전역에 여행을 하다보면 오래된 화교학교들이 약간은 뜬금없는 지역에 있는걸 볼 수 있는데요. 무언가 그 지역에 수요가 있으니 화교학교를 만들었겠죠.
한국에도 인천과 부산에 보면 화교학교가 있듯이 말이죠.
저 인형모형에서도 알 수 있듯이 중국사람들의 탁구사랑…
중국의 시골학교들 가보면 운동장에 대부분 탁구대가 있습니다 문제는 야외탁구대라서 바람불면 좀 치기가 힘들고, 또 큰 돌을 사각형으로 만들어 탁구대로 사용하는데 표면도 울퉁불퉁해서 이런 환경에서 어릴때부터 탁구를 연습하니까 수많은 고수들이 탄생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게 합니다.(농담입니다)
그러면서 중화식 절도 많이 설립을 한 것 같구요. 확실히 태국에서도 중화식 절과 태국식 절은 확연히 다르죠.
그러면서 이런 연극공연장도 생겨나서 여가생활을 보낼 수 있는 환경도 점차 마련이 된 것 같습니다.
그 당시에도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빈부의 격차가 있어서 돈을 많이 버는 사람들의 집과 가난한 사람들의 집이 확연히 차이가 난다는 것을 태국전역 돌아다니다보면 볼 수 있습니다. 조만간 230년된 중화권 부자집의 주택을 한 번 소개해 보겠습니다.
방콕 차이나타운 하면 저 위의 사진거리가 대표거리풍경이죠. 야경이 멋진 거리인데요. 저 거리를 The Gold Road 라고 하는데 실제로 금을 매매하는 가게가 많습니다. 달리 황금거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부터 금매매를 많이 했던 것 같네요.
금매매가게도 저렇게 모형으로 만들어 두었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금은 현금이상의 가치를 가집니다. 태국의 불상들 중에 금으로 만든 것들은 도난을 피하기 위해 겉에 다른 재료로 위장을 해 두는데, 그래서 불상의 머리를 많이 약탈했다고도 합니다. 아시는분도 많겠지만… 태국에서 불상머리 매매는 범죄행위입니다.
저 시대의 사진기록이 많이 남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태국에서 중화권 사람들의 생활상은 어딜가나 저런 사진기록으로도 엿볼수 있어서 나름 고증하기는 쉬울 것 같습니다.
아래사진은 태국에 살고 있는 화교들의 직업이라고 소개를 하고 있네요.
그 당시 태국에서 발급한 비자인데요. 기록을 보니 10밧인가?로 2년간 거류비자를 발급했다는 기록도 있고, 비자발급을 위한 인세도 20~400밧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날 여기서 이런저런 이전 기록에 대한 설명을 읽어 보았는데, 이민1세대 중화권사람들의 삶은 엄청 힘들었다고 묘사가 되어 있습니다. 원래 이민1세대는 고생하는 세대이고 2세대 3세대는 그걸 누리는 세대라고도 이야기를 합니다.
저는 가끔 1900년대 전후의 중국상해지역, 광동/홍콩지역, 또 태국, 말레이시아 지역의 삶으로 돌아가서 살아 보고 싶다는 상상을 하기는 합니다. 그건 제가 중화권문화에 관심이 많아서 일 수도 있는데요.
만약 제가 100년전 200년전 저 당시 사람이었고, 중국본토의 삶이 시궁창이었다고 한다면 저 역시도 어딘가로 떠나서 인생을 개척하려 했을 것 같습니다. 저의 성향상…
저 당시 아편전쟁 패배로 청나라는 국고를 채우려고 백성들을 상대로 세금도 많이 거두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삶이 아주 피폐해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당시 정부는 국민들이 해외로 빠져나가는 것을 적극적으로 막는 정책을 사용했는데, 상대적으로 북경에서 먼 광동 및 남쪽까지는 그렇게 제한할 수 없었다고 하네요.
그리고 저 여자분의 이름은 木 木 燕 이 아니라 林燕 인 것 같습니다. 나무목木 2개를 좀 더 붙여써야 할 것 같은데… 본인이 직접 썼다면 교육을 많이 못 받은 사람이었거나, 한자를 평소에 많이 써 보지 않은 태국사람이 저 문서를 작성했을 수도 있겠네요.
그리고 燕은 제비 라는 뜻이고, 이전에 황제의 딸 이라는 TV 드라마에서 딸의 이름도 저 燕 이 있었던 걸로 기억을 합니다.
여기 태국의 대중국수출물품 중 하나에 제비집이 있었다고 하죠.
그래서 방콕 차이나타운에 가면 이 제비집 파는 상점과 제비집요리식당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 제비집은 해안가에 사는 제비의 집으로 우리 시골에서 사는 그 제비집과는 다릅니다. 주로 해안가의 생물과 본인들의 침을 섞어 만들기 때문에 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공급량이 극히 적고 채집하기가 어려워 가격이 비싼 것이지, 뭐 딱히 약용효과는 없다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는 한번 제비집요리를 먹어 보았습니다.
잠시나마 100년 200년전으로 태국이주한 중화권사람들의 삶으로 시간여행을 한 김에, 차이나타운에 있는 중화권느낌 물씬나는 카페에서 음료도 마시고. 빵도 먹었는데요. 저 빵에 제공된 저 소스가 너무나 맛있더군요.
자칫했으면 하나 더 시켜 먹을뻔 했습니다. 저의 대만카페메뉴로 만들어 볼 생각으로 이미 만드는 법은 배웠습니다.
다시 첫번째 사진으로 돌아가서…
그 당시의 삶이 얼머나 힘들었으면, 중간의 하늘색옷 입은 여자분은 시장통 한가운데서 쓰러져 있습니다.
오늘은 태국에서 차이나타운이 형성되게 된 역사적배경과 그들의 삶을 짧게나마 훑어보았습니다.
뭐가 어찌되었던간에 내 나라를 떠나 외국에서 정착하고 살아간다는 건 쉽지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어려운 환경에 어쩔 수 없이 떠밀려 해외로 나온 사람들도 있을거구요.
방콕 차이나타운에 오시게 되면 이런 역사적배경도 생각하시면서 둘러보시면 더 재미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숙소에서 간단히 인사만 하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온 여자분이 “나 이 소주 즐겨마신다. 함께 마실래?” 하면서 제 앞에 앉더군요. 저는 원래 술을 마시지 않지만, 밤10시 넘어 여자분이 술을 가지고 왔다는건 뭔가 함께 ‘대화’를 할 상대가 필요한 것이 아니겠나 라는 생각에 저도 함께 마셨습니다.
처음 저 여자분을 봤을때, 팔, 손목, 몸통, 종아리 등등 온 몸에 문신이 있어서 뭔가 성격이 과격?할 거라는 그런 선입견이 조금 있었습니다. 종아리 뒷쪽에 일본사무라이얼굴인지 일본가부키여성얼굴인지 가 크게 그려져 있어서 더 그랬는지 모릅니다. 특히..
양쪽귀에 위의 사진속 머리묶은 남자처럼 귀에다가 링을 넣은걸 하고 있어서 뭔가 펑키스타일? 반항적인 성격? 같은 선입견이 있었습니다.
동남아국가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는데, 잠시 비자문제로 방콕에 왔다고 하더군요. 무튼…
제 앞에 큰 잔을 두고 술을 따라 주면서
“한국영화 많이 보는데, 한국 꼭 가보고 싶다. 한국은 뭔가 낭만적이고 특별한 느낌이 있는 나라이다” 라고 하더군요.
제가 외국에서 많이 듣는 말이죠. ‘한국남자 잘 생겼다. 한국남자 로맨틱하다’ 다 그렇지 않다고 반박은 합니다.
한국소주 중 오리지널맛은 안 마시고 이 요구르트맛 소주만 마신다고 하더라구요. 잔을 들어올리며 “한국어로 술잔 부딪히면서 하는말 뭐지? 영화에서 자주 봤는데” 라고 하길래 ‘건배’ 라고 해 주니 곧잘 따라하더군요.
술을 마시면서 이런저런 인생살이 이야기를 하더군요. 저는 주로 들어주는 역할이었습니다. 외모와는 달리 말투나 생각이 뭐 ‘난 이 세상의 모든 규칙을 파괴하겠어’ 는 아니더군요. 그냥 집을 떠나 이렇게 세계를 돌아다니며 살아가는 삶을 살고 싶어 하는 부류이더군요. 저의 크리미아 친구와 너무나도 비슷한 삶을 살고 있네요.
저의 크리미아친구 유튜브캡쳐입니다. 이 친구도 지금 베트남에서 영어 가르치며 지금까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살고 있는데요. 중국-태국-영국-베트남… 곧 러시아 가서 1년살기 하고 나서 다시 다른 나라로 갈 계획을 세우고 있던데, 제가 대만에 와서 나랑함께 어학가르치자 라고 하니까 긍정적으로 생각을 해 보겠다고…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많죠. 지금 저의 대만카페에서 영어가르치는 그 미국인들도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살고 있구요.
큰 틀에서 보면 저도 한국떠나서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살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정착해서 사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보면 ‘SURVIVE’ 하는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람사는 것 비슷하고, 고민하는 것도 비슷합니다.
저 크리미아친구랑도 일주일에 몇번은 서로 대화를 나누며 아이디어도 주고받고 하고, 어제 남아공여자분과 이야기를 해 봐도 하는 고민이 비슷비슷 합니다.
늦은 시각이지만 편의점에서 면을 사와서 술을 마시기 전에 먹더군요. 그러면서
“공복에 술 마시면 안 돼”
또 폭탄주에 대해서도 잘 알더군요. 그래서 제가 폭탄주도 조심해서 마셔야 한다. 마실때는 그냥 잘 넘어가는데, 한순간 훅 가는 수가 있다. 라고 하니 자기도 잘 알고 있다면서 그래서 이런 방콕이나 낯선 곳에서는 그렇게 술 안 마신다. 라고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엄마가 나를 그렇게 키우지는 않았어” 라고 정확하게 이야기를 하더군요.
참고로, 가장 억양이 깨끗한 영어사용국가가 남아공과 캐나다쪽 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이전부터 남아공으로 어학연수 가는 학생들도 있었습니다.
영어강사생활은 재밌냐 라고 물으니, 학생들이 열심히하면 재밌는데, 학생들중에 적극적으로 말도 하지 않고, 숙제도 잘 하지 않고, 물어도 대답도 잘 안하는 학생과 수업을 하면 강사생활에 회의감이 느껴진다 라고도 하더군요.
대충 어떤 느낌인지 이해가 가더군요. 저도 어학을 가르칠때 수업을 잘 따라오면 재밌는데, 수업을 잘 따라오지 못 하면 많이 힘들거든요. 특히 틀릴까봐 부끄러워서 말 하지 않는 학생들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외국어를 틀리게 말하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거 아닌가요? 왜냐하면… 한국어능력시험 문제집 하나 찾아서 풀어보세요. 이건 무슨 한국어문법인데 생전 평생 듣도보도 못 한 그런 문법들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한국어가 다 맞을 거라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거든요. 내 모국어 문법도 다 맞을 수가 없는데, 외국어 틀리는 것이 무슨 큰 일입니까?